- 학습, 알아서 잘해라. 막 부딪힌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영우는 세주의 문자를 떠올렸다. 그래, 학습. 근데 사회 생활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야, 인마. 어른에게는 어른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입만 살아서는 아주. 어릴 때도 살갑거나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점점 커가면서 세주는 더욱 말수가 줄었고 냉소적으로...
“가자, 윤댈.” 한창 서류 정리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홍보팀의 박 대리가 영우의 가림막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으엥, 벌써? 네 시부터 아니었어?” 중간에 갑자기 김 주임이 친 사고를 대신 수습해주느라 회의 준비가 늦어졌다. 김 주임은 다 좋은데 손이 너무 느렸고, 일이 터지면 정해진 수순처럼 패닉에 빠지곤 했다. 영우는 다급히 시계를 봤다. 세...
“날씨 한번 좋네.” 영우는 회사에서 두어 블록 떨어진 공원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심은 건너뛰기로 했다. 전날 과음을 하면 다음 날은 영 식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사무실 공기는 시베리아 칼바람이 불어도 세상엔 봄이 착실히 오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자니 언제 이렇게 얼굴에 닿는 햇볕이 보드라워졌나 싶어 절로 눈이 스르르 감...
“내가 제출 기한을 오늘까지, 라고 했으면 오늘 아침에 가져 오는 겁니다.” “아, 넵.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주의,” “앞으로. …… 앞으로가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네, 네?” “일을 이렇게밖에 못하는데, 내가 다시 김은서 씨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 “기한에 늦었으면 일이라도 제대로 하든가. 입사 서류에는 토익 점수가 거의 만점이...
***** “저기, 제 보호자가,” 하경은 바이탈 체크를 하러 들어온 간호사를 붙들며 말했다. 윤수가 나간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바로 앞의 편의점에 간 사람이 지체할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어디 식당에서 밥이라도 먹고 오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초조하게 기다린 게 여기까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
“그나저나 하경이라……” 불쑥 그의 입에서 나온 하경의 이름에 윤수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장수철이 꼬았던 다리를 훌쩍 풀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는 채 반도 뜨이지 않은 윤수의 눈동자에 집요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진짜 몰랐다, 윤수야. 하경이라니, 세상에…… 선윤수가 눈이 뒤집힌 게 이하경이라니. 상상도 못했어.” 눈을 치뜬 장수철이 엄지손톱으...
시골이기는 해도 병원은 시내에 있어 주변이 꽤 번화했다. 윤수의 짐작과는 달리 아직 문을 열어 놓은 식당들이 꽤 있었지만, 그는 병원의 문을 나서던 순간부터 눈에 띄었던 건너편의 편의점을 향해서 곧장 걸음을 옮겼다. 칫솔, 치약…… 비누도 있어야겠네…… 아, 속옷도 사고. 횡단보도 앞에 선 윤수는 편의점에 들어가자마자 물건들을 빠르게 집어 담을 요량으로 머...
“…… 그래서 내가 순식간에 그 새끼 가슴을 주먹으로 빡, 쳤지. 그랬더니 뒤로 벌렁 나자빠지잖아. 그래서 냉큼 그 위에 올라타서 몇 대 때려주곤 하경이 어디 있냐고, 안 불면 이대로 죽인다고 했더니 사지를 벌벌 떨면서 알려주더라고.” 윤수는 하경의 옆에 모로 누워 팔을 괸 채 열정적으로 설명을 했다. 1인용의 환자 침대는 도저히 성인 남자 두 명을 수용할...
***** 윤수는 하경이 들어간 검사실 앞에 멍하니 앉아 바닥에 난 사각 무늬만 의미 없이 헤아리고 있었다. 이전 병원에서는 검사나 치료 기록 등을 하나도 받을 수가 없었다. 여긴 퇴원 조건이 그래요. 팔짱을 낀 채 여전히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던 남자에게 윤수는 다른 대꾸를 더 하지 않고 그냥 돌아섰다. 어차피 그 병원에서 했다는 검사 기록 같은 건 받는다...
윤수는 그대로 병실의 불을 켤 생각도 않고 앉아 하경의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내가 왔는데, 뭘 이리도 곤하게 잔단 말인가. 윤수는 호흡기 마스크의 안을 규칙적으로 흐렸다 밝히는 하경의 숨에 안도하며, 한편 그를 못내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어, 하경아.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하경의 몸을 흔들어 깨워 저를 보게 하고 싶은 충...
***** 이런 외지고 험한 데는 대체 무슨 수로 찾아내는 건지. 장진태가 이른 병원에 도착한 윤수는 그 후미진 형세 앞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루에 서너 대나 지나다닐까 싶은 한적한 국도에서도 한참을 더 좁은 비포장도로를 들어가야만 나오는 작은 병원 건물은 주변의 수풀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고, 외벽에 붙은 병원 간판의 조명도 대부분...
***** “이 시간에 집 앞까지?” 장진태가 윤수의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지만 집을 나선 윤수는 곧장 장진태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 그가 저녁에 특별한 일정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수가 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인간이니 최대한 그가 무방비할 때 단둘이 만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혼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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