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블릿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선재는 눈동자만 굴려 옆에 앉은 영우를 흘끔 훔쳐보았다. 그의 시선은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분명 딴생각에 빠진 듯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선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영우가 선재를 돌아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영우를 끌어다 품에 안으며 선...
죽을힘을 다해서 뛰어 내려갔지만 당연히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따를 수는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세주는 황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진주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찬 그는 그대로 무릎을 짚은 채 허리를 숙였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이마에선 땀이 후드득 쏟아졌다. 잠시 그대로 숨을 고른 뒤 눈으로 흘러든 땀을 닦아내며 겨우 허리를 폈을 때...
*** 완벽하다고 하긴 좀 그래도 큰 실수만 없으면 그럭저럭 문제는 없을 정도로 연습은 끝냈다. 어차피 떠 있는 스크린의 글자를 거의 읽으면 되는 수준이니까 특별히 외울 것도 없고. 게다가 수정한 자료에 어느 부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한 대략적인 가이드까지 덧붙여준 진주 덕에 세주로서는 더욱 별달리 준비할 것이 없었다. 강의 시간보다 삼십 분 정도 일...
*** 한꺼번에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엘리베이터엔 세주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문이 닫히자 그는 공연히 불이 들어와 있는 숫자 버튼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교수실이 몰려있는 그 층엔 여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교수실에 들르라는 며칠 전 교수의 문자에는 방문 시간과 장소 외에 다른 말은 없었다. 답장으로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세주는 그렇게 하지 않...
*** “어흐. 날씨 좋다.” 들뜬 목소리로 동준이 유난을 떨었다. 응.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세주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월에 접어든 천지는 그야말로 신록이 넘실댔다. 그러나 잠시 시선을 두었을 뿐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 세주를 보며 동준이 츳, 혀를 찼다. “솔직히 말해. 너, 로보트지? 사람 아니지?” “뭔 헛소리야?” “아니, ...
*** “진짜 괜찮겠어요?” 앞장을 서는 진주를 붙들며 세주가 물었다. 휘적휘적 걷는 폼이 금방이라도 자빠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보나마나 반쯤 눈을 감고 걷고 있겠지. 아아. 괜찮아, 진짜로. 진주가 혼잣말인 듯 중얼대며 팔을 휘저었으나 금세 세주에게 맥없이 붙잡힐 뿐이었다. 이 망할 놈의 코트만 아니라도 부축을 하기가 덜 힘들 것 같은데. 세주가 속으...
*** 남자가 버벅대며 말을 씹자 보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선 여자의 얼굴이 덩달아 빨개졌다. 말을 씹은 남자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여자에게 눈짓을 하자 그와 동시에 보드에 뜬 슬라이드가 다음 장으로 휙 넘어갔다. 세주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그 모습과 그 위에 걸린 벽시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수업이 시작된 지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진주는 ...
*** 올 거면 미리 말을 하라고 내가 그렇게, 어휴. 언질도 없이 토요일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친 세주를 본 영우는 삼십 분째 같은 욕과 푸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뭐,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애초에 올 생각도 아니었다. 다만 갑자기 오늘 아침에 과 모임이 다음 주로 미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것 외엔 딱히 주말에 다른 계획이 없는 데다, 지난번 통화...
*** 같은 조라고 해도 굳이 옆에 앉을 필요는 없지 않냐고 세주가 물었지만,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진주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옷차림은 어제와 같았고, 아닐 거라 믿고 싶지만 묶은 머리 역시 어제와 모양이 비슷해 보였다. 특별히 냄새가 나지 않으니 그나마 감사한 일이라 생각하며 세주는 계획서에 다시 눈을 두었다. 이메일은 어제 진주와 헤어...
“저기요. 저 아세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홱 몸을 돌린 세주가 다짜고짜 물었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놀란 상대가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되레 입을 비쭉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야, 홍진주.” 어휴, 진짜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아니, 전화를 받기 싫으면 문자에 답만 해도 됐잖아. 왜 쌩을 까. 어디서 그런 나쁜 걸 배웠어? 하다 하다 공학관 앞에서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명칭은 허구입니다. 학생들은 제 이름이 불릴 때마다 짧은 대답과 함께 손을 들었고, 그런 그들의 면면에 교수는 조금씩 시간을 들여 눈을 맞추었다. 첫 시간이니 얼굴 정도는 익히자며 웃음을 짓던 그는 썩 호감형인 얼굴에 유쾌한 인상이었다. 어쩌면 이런 고리타분한 문학보다는 음악이나 디자인 같은 예술 분야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아,...
“내가 오는 주말 정도는 좀 자제를 할 수 없어?” 저 정도면 그냥 들이붓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잼을 식빵에 펴 바르면서 세주가 투덜거렸다. 괜히 민망해진 영우가 헛기침을 하며 그의 잔에 커피를 채웠다. “뭐, 뭐를……” “뭐는 뭐야. 모른 척은.” 소리를 참는다고 참았는데……. 오늘은 세주도 있으니 그만 두자고 매달리는 저를 가볍게 제압했던 어제의 선...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